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문단 편집) === 히스파니아 원정의 시작 === 스키피오가 이렇듯 경력을 쌓아가던 기원전 211년, 로마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스키피오와 아버지 푸블리우스와 삼촌 그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스페인 원주민 동맹군의 배신과 카르타고군의 매복 공격으로 참패했고 두 사람 모두 전사했다는 것이다. 원로원은 즉시 그 해의 법무관인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군대를 수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네로는 6,000명의 보병과 300명의 기병, 그리고 라틴 동맹에서 온 6,000명의 보병과 800명의 기병을 이끌고 히스파니아로 향해 타라코나에 상륙한 뒤 스키피오 형제의 잔당과 합세했다. 이후 네로는 [[한니발 바르카]]의 동생이며 히스파니아의 주요 지휘관인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일루투르기스와 멘티사 사이에 있는 흑석 근처의 협곡으로 가두었다. 하스드루발은 협곡을 벗어나게 해준다면 카르타고군을 히스파니아에서 철수시키겠다고 제안했고, 네로는 협상에 응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온갖 사소한 일로 협상을 질질 끌다가 야밤을 틈타 부하들을 이끌고 작은 길을 통해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날이 밝아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네로는 하스드루발을 추격했으나, 그때는 이미 멀리 달아난 뒤였다. 네로가 하스드루발을 놓쳤다는 소식을 접한 원로원은 그를 다른 사령관으로 교체하고 추가 병력을 파견하기로 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누구도 이 지휘권을 맡길 원하지 않아 침묵만이 회의장을 감돌았다고 한다. 당시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의 패배로 에브로 강 이남의 로마 세력은 완전히 소멸한 상태였는데 로마 측에서는 스페인에 파병할 병력을 증강하였으나 그 병력의 규모는 전직 집정관들인 스키피오 형제의 병력보다 규모가 작았으며, 사기도 떨어졌고 병력 구성도 신병이 많았다. 게다가 이탈리아 내에서의 전황도 대단히 심각한 상태여서 이탈리아 남부 전체가 한니발에게 넘어갔으며, 이탈리아 북부 역시 갈리아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거기에 로마의 아래에 위치해 있었던 카푸아 역시 한니발에게 넘어간 상태인 데다가 스페인에서의 로마 세력의 소멸로 인해 곧 스페인 식민지와 카르타고 본국의 원조가 한니발에게 도달할 게 자명했다. 이처럼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히스파니아 전선에 다들 가고 싶어하지 않아 침묵만 흐르고 있을 때, 스키피오가 나섰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연단에 서서 아버지와 삼촌이 지난 8년간 히스파니아에서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것을 설명하며, 그들과 조국 모두를 위해 적의 합당한 복수자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원로원은 24살밖에 안 된 그에게 이례적으로 [[임페리움]]을 수여했다.[* 사실 이런 상황이 당대 로마에 매우 이례적인 것은 아니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실력있는 지휘관이 필요한 상태였고 따라서 종종 의외의 인물이 지휘권을 받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고작 백인대장에 불과했던 [[마르쿠스 켄테니우스 페눌라]]는 로마가 속한 주인 라티움의 바로 밑에 위치한 캄파니아 주의 지역을 잘 안다는 이유를 들어 로마 원로원에게 군단 지휘권을 요구하였고 로마 원로원은 이를 승인한 바 있었다. 단 그는 4개 군단, 1만 6천 병력을 이끌고 행군하다 근처에 있었던 한니발의 본대의 정찰에 의해 동향이 파악되었고 한니발은 자신이 직접 이끄는 군대를 행군로에 매복시킨 뒤 [[실라루스 전투]]에서 이들을 전멸시켰다.] 다만 그 해에 선출된 법무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에게 공식적인 지휘권을 주고 대신 실질적인 지휘는 스키피오가 위임받도록 했다. 기원전 210년, 스키피오는 실라누스, 절친한 친구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와 함께 1만 보병, 기병 1,000명, 35척의 함선을 이끌고 히스파니아로 출진했다. 그는 티베르 강 입구에서 배를 타고 출진하여 에트루리아 해안을 따라 피레네 산맥 근처까지 이동해서 군대를 상륙시킨 뒤, 여기서 해안선을 따라 육군과 해군이 나란히 진군하게 했다. 얼마 후, 스키피오는 타라고나에서 현지 군대와 합세했다. 이리하여 이베리아 전선의 로마군은 보병 25,000명, 기병 2,500명, 함선 35척으로 불어났다. 스키피오는 일전의 심각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의를 잃지 않고 에브로 강 이북의 영역을 끝까지 사수한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셉티미우스]] 외 외 병사들을 극찬하고, 자신이 조만간 이베리아를 정복할 테니 끝까지 따라달라고 요청했다. 스키피오의 탁월한 언변은 군심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병사들은 스키피오 형제가 이루지 못한 사명을 그가 이룰 수 있도록 소임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스키피오는 우선 스페인 북부 타라코나에서 첫번째 겨울을 보내면서 켈티베리아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는 한편, 적군의 배치 상황을 면밀히 조사했다. 그 결과 카르타고군이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3개 군대로 나뉜 채 로마군을 막을 태세를 갖췄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반면, 적의 본거지인 카르타고 노바가 이베리아에서 대규모 함대를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도시라는 것도 파악했고, 적은 로마군이 여기로 조기에 들이닥치지 않으리라고 여기고 3,000명의 수비대만 배치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노바를 급습하기로 작정하고, 기원전 210/209년 겨울 내내 그곳의 지형과 방어 구조 등을 철저히 조사했다. 그는 그곳에서 일했던 어부들로부터 도시 북쪽을 둘러싼 [[석호]]는 매일 저녁에 썰물로 물이 얕아지면서, 도시로 걸어서 접근이 가능할 만큼 얕은 갯벌지대가 드러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만약 카르타고 노바를 공략하는 데 성공한다면, 적이 본국으로부터 지원받을 길이 요원해지면서 이베리아 전쟁의 전환점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카르타고 노바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초기 공략에 실패할 경우 적군이 되돌아와서 로마군을 섬멸하려 들 위험성이 있었다. 여러모로 도박수였지만, 그는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